인스턴스 중심주의(?)에 대항해 기치를 올린 퍼시스턴트 월드 컨텐츠의 다양한 모색이 mmorpg의 '컨텐츠'적인 측면에서의 현재 트렌드라면, 시스템적인 분야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새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EQ1에서 정립되어 지금은 표준이 된 '탱딜힐 파티플레이 모델'의 파괴이다.
1. 탱딜힐 모델의 정립
EQ가 처음 선보인 탱커-딜러-힐러의 삼위일체가 어그로를 영접하는 시스템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EQ는 사실 후대의 와우처럼 퀘스트만 따라가면 레벨업이 술술되는 편리한 게임이 아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죽치고 닥사냥' 하는 스타일의 레벨업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닥사'라니 이 무슨 촌스럽고 지겨운 개념인가 싶겠지만 그 지겨운 닥사마저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게 탱딜힐이었던 것이다.
이 시스템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냐면, 이후에 출시된 거의 대부분의 mmorpg들이 탱딜힐 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솔로잉을 지향하는 게임들은 파티플레이를 크게 고려치 않으니 그런게 없다. 여기서는 파티플레이만을 말하는거니까.) 모델 자체의 완성도가 극히 높았음을 방증하는 사례이다. 하지만 그만큼 자주 쓰임으로 인해서, 파티플레이의 단점도 빠르게 노출되기 시작한다. 탱딜힐 시스템의 굵직한 단점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빈번히 지적되곤 한다.
첫번째, 파티를 운영하는게 꽤 번거롭고 괴로운 일이다. 파티에서의 역할에 따라 사람들을 모집해야하고, 모집한 사람들과 함께 파티 플레이를 진행해야 하며, 중간에 실패가 있을 경우 이 실패가 파티원 중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 검토하고 재도전해야하는데 이 과정이 무척 힘들고 번거롭다. 아울러 파티 플레이의 결과로 얻은 보상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있다.
두번째, 자기가 원하는 플레이를 맘대로 하기 어렵다. 난 딜러를 하고 싶지만 파티에 탱커가 부족하고 내가 탱킹을 할 수 있는 경우 어쩔 수 없이 탱커 플레이를 강요받는다. 힐러일 경우 이런 문제는 훨씬 더 커서, 결국은 언제나 힐러 플레이 밖에 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도 빈발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이 좋아하는 역할을 플레이하고 싶어 하지만, 그 취향이라는게 대체로 방향이 비슷해서, 결국 누군가는 파티를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났다.
세번째, 여러 명이 함께 플레이하기에 불가피하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야만 한다. 누군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그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잠시 기다려줘야 한다. 반대로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을 경우 남들의 눈치를 보면서 적절한 타이밍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이는 파티원의 규모가 커지는 공격대 급의 컨텐츠에서 훨씬 심각한 문제가 된다.
2. 와우의 개선 시도
와우는 이런 탱딜힐 모델의 유용함을 깊이 이해하되, 그것이 갖는 단점들에 대해서도 적절히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EQ가 보여준 탱딜힐의 단점을 극복할 여러가지를 시도했었다.
우선 파티원의 숫자 자체를 줄여버렸다. 풀파티 5명은 EQ와 DAoC 등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너무 적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할만한 인원수였지만 결과적으로 꽤 괜찮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파티원의 숫자가 줄어듦으로 인해서 파티 운영에 드는 비용이 상당히 낮아졌다.
두번째는 전 클래스의 하이브리드화. EQ의 지독하게 엄격했던 클래스와 파티에서의 역할 간 상관관계에 비해 와우의 클래스들은 굉장히 유동적이어서, 마법사, 흑마법사, 사냥꾼, 도적을 제외한 다른 6개 클래스는 모두 최소 2개 이상의 역할 (탱커+딜러, 힐러+딜러, 탱커+딜러+힐러) 을 소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EQ의 파티플레이가 기본적으로 '닥사' 이기에 불가피했던 '한 차례의 플레이 시간'을 인스턴스를 통해 확연히 줄여버렸다. 닥사냥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모든 파티원들이 지치고 피곤해질 때까지 6시간씩 계속하는 경우도 있고, (리니지2의 경우 20시간이 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파티원들간에 마찰이 생기거나 하는 경우 불과 수십분만에 끝나기도 한다. 그러나 와우는 이런 중구난방식의 파티플레이 시간을 '인스턴스' 단위로 규격화하는데 성공한다. 인스턴스 이외의 컨텐츠를 즐기는 데는 굳이 파티를 할 필요가 없게 만들고, 인스턴스 플레이에 소요되는 시간을 30분~ 40분 이내로 짧게 구성한 것이다.
3. 대체 모델의 모색
와우가 다방면으로 EQ의 탱딜힐 시스템을 개선하긴 했지만 와우 자체가 이미 6년 된 게임이다. 플레이어들은 이제 단순히 탱딜힐 시스템에 불편한 부분들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탱딜힐을 기반으로 하는 파티플레이 자체에 싫증을 내는 것으로 보인다. 컨텐츠로서의 수명에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게임들이, 일차적으로는 탱딜힐 시스템이 내재적으로 갖는 즉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차적으로는 플레이어들이 탱딜힐에 대해 앞으로 드러내게 될 피로감에 대한 걱정으로, 탱딜힐과는 전혀 다른 파티플레이 시스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같이 모여서 플레이할 수만 있다면 그게 반드시 탱딜힐이 되어야만 하는건 아니잖은가. 하는 생각들이다.
잠깐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리니지1 클론 게임들의 경우 '솔로잉 중심주의'를 표방해왔고,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탱딜힐과는 거리가 먼 전투 시스템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은 대부분 리니지1의 전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파티 플레이를 염두에 둔 구성이 아닌 관계로, 다수의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전투가 특정한 파티 플레이의 형태를 띄기 보다는 그냥 마구잡이로 때려잡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어찌보면 탱딜힐의 대안을 모색해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뭐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4. 시도되고 있는 모델들
사실 이 분야는 퍼시스턴트 월드와 같이 부작용이 두드러져서 모두가 염증을 느끼는 수준은 아직 아니다. 그런 움직임이 서서히 태동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새로운 시도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그런 중에서도 그나마 눈에 좀 띄는 케이스라면 역시 블레이드&소울과 길드워2 정도?
다들 알다시피 블소에는 힐러가 없다. 모든 클래스를 딜러라고 봐야하고, 단지 딜을 하는 패턴이 어떤가에 따라서 클래스가 나뉘는 스타일이다. 이렇게 구성할 경우 앞서도 말한 '그냥 마구잡이로 때려잡는 식'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블소 클베 리포트를 잘 보다보면 재밌는게 눈에 들어온다. '합격'의 개념이다. 어디 시험봐서 붙었다 뭐 이런 얘기가 아니라 .. 힘을 합쳐서 때린다는 얘기다. 일정한 조건이 갖춰졌을 때 여러 명이 동시에 같은 기술을 쓰면 발동되는 뭐 그런 것 같은데, 겉보기에는 철권 TT의 태그시 합동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FF11에서 시도했던 스킬 체인 시스템과 더 비슷해보인다. 물론 실제로는 순차적으로 들어가는 체인 개념보다는 말 그대로 함께 사용하는 합격에 더 가깝 ... 근데 블소는 아직 런칭을 안해서 내가 잘 모르니 여기까지.
아울러 전에도 언급했던 길드워2 역시 전통적인 탱딜힐 모델에서 변화를 꽤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파티 플레이시 역할을 탱딜힐이 아니라 딜러/서포터/컨트롤러로 나눈다고 한다. 힐러의 개념을 아예 없애버리고, 셀프힐 중심으로 치료기능을 분산하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길드워2와 블소는 그 방향성에 있어서 '힐러의 존재를 대폭 축소하거나 아예 없앤다' 라는 공통점을 보인다. 탱딜힐 중에서 힐러 구하기가 젤 어려웠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 아울러 단순히 클래스 구성 상의 변화를 넘어서서, 전에도 얘기했듯 굳이 누군가를 초대하거나 수락하지 않고도 같은 목표를 향해 플레이 중인 플레이어들이 자동으로 자연스레 파티로 묶이게 되는 장치 또한 눈여겨 봐야하지 싶다.
사실 반드시 mmorpg일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다양한 형태의 '파티 플레이 모델'을 찾아볼 수 있다. 몬스터 헌터의 단체 사냥은 어떤가? 디아블로2만 해도 파티플레이가 가능하되 탱딜힐은 아니다. LOL같은 AOS에서조차 팀의 '조합' 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며 이는 즉 파티플레이를 암시한다.
5. 그래서 ...
그래서 결론은, mmorpg에서 탱딜힐 시대의 붕괴를 예감한 여러 개발사들이 다양한 파티 플레이 전투 모델들을 시험하고 있다는거다. 탱딜힐이 이룩했던 강력하고 탄탄한 파티 플레이의 시대를 다시 보여줄 또 다른 강력한 모델이 나올까하고 생각해본다면, 탱딜힐의 고대 제국이 워낙이 막강했던 터라 이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마도 당분간은 각 게임들이 각자 자기네 전투 시스템에 맞는 파티플레이 모델을 쓰지 않을까 싶다.
지금 단계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대체 모델의 공통점을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자면 첫번째로 '힐러를 없애'는 방향이라는 것. 힐러의 플레이를 사람들이 무척이나 싫어했던 모양이다. 그 기능 자체를 없애든, 골고루 분산하든, npc로 만들어서 플레이어를 따라다니게 만들든, 중요한건 힐러라는 플레이어 캐릭터 클래스는 이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두번째는 파티라는 테두리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것. 특히 길드워2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특징인데, 명시적 파티장이 존재하고 이 파티장이 파티플레이에 관련된 일종의 '잡무'를 할 필요 없이 시스템이 알아서 모든걸 해주려는 시도가 꽤 솔깃해보인다. 특히 지난번에 언급했던 워해머 온라인이나 리프트 등의 퍼시스턴트 월드 컨텐츠와 연계해서도 꽤 진척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타까운건 이런 시도가 길드워2가 처음인데 길드워2가 아직 런칭을 안해서 ... 실제로 이런 시스템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는 예측이 어렵다.
마지막으로 이건 그냥 사족인데, 안타까운 케이스의 '테라'가 있다. 테라는 그간 mmorpg에서 불가능하거나 아주 어렵다고 간주되어왔던 '액션성'을 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전투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일대일 전투는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다들 테라를 쿠마스 온라인이라 부르면서 그 '노가다성'을 욕하곤 하지만 정작 쿠마스와의 전투는 무척 재미있다. 무사로 레벨업하면서 4레벨 정도를 다른거 아무것도 안하고 (파티X 퀘스트X) 쿠마스만 잡아서 레벨업을 했는데도 못해먹을 정도는 아니더라.
문제는 파티플레이였다. 이런 대단한 액션성을 완성했다면, 파티플레이 역시도 탱딜힐을 벗어나 테라 고유의 전투 시스템에 기반한 모델을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슬프게도 테라 개발진이 시간이 부족했는지 여유가 없었는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파티플레이 모델을 내민다는게 너무 모험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오래된 탱딜힐을 그대로 갖다붙였고, 이는 테라의 전투가 완성한 바에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수준과 방향이라서 무척 안타깝다.